해방 이후 미군정은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 1호, 2호와 그 후의 일련의 군정법령을 통해, 주한미군사령부가 “① 통치권의 담당자로서 남한 내의 유일한 정부이다. ② 미 본국 정부의 한 대리자로서 군사점령자의 권한을 행사한다. ③ 남한의 사실상 정부로서 자치정부의 일반 기능을 담당한다. ④ 귀속재산의 소유자로서, 관리자로서, 장차 한국정부의 피신탁자로서 활동한다.” 등의 사항을 명확히 했다. 미군정의 이러한 입장은 미군정의 법률고문이었던 프렝켈(Ernst Fraenkel)의 견해에 따른 것이었다. 즉 프렝켈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국제법의 견지에서 볼 때 한국은 ‘국민이 없는 땅’이며 ‘정부가 없는 진공상태’이기 때문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한국은 경제적, 법적 진공상태의 존재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조선이 그들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은 곧 망국 이전의 국가로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국가 창설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이 무효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은 자신의 혁명적 활동에 의해 해방을 쟁취한 것이 아니므로 한국의 운명은 해방자의 결정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 미국인들의 국제법적 해석이었다.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난 한국의 법적 지위에 대한 미군 당국의 이러한 인식은 그들이 피식민국가를 해방하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단지 승전국으로서 점령군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한국의 어느 정치세력에게도 국가건설을 위한 최종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후의 국가건설을 그들의 구상대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국가 건설의 주권적 의지가 한국인들에게 있지 않고 미군정에 있다는 사실은 점령군으로서의 미국 내지 미군정의 독자적 판단에 의한 것일 뿐 한국인들의 동의나 승인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註01
(1) 재산이동금지 (법령2호)
구(舊) 조선총독부의 권능을 그대로 이어받는 미군정은 1945년 9월 진주와 더불어 곧장 ‘적성 재산의 이전 제한조치’를 공포하고 지난 일본인 소유 내지 지배하에 있던 모든 재산에 대하여 일체의 재산권 행사를 금지시켰다. 이것이 곧 1945년 9월 25일 공포와 함께 곧바로 시행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미군정청 법령 제2호 “패전국 정부 등의 재산권 행사 등의 금지”이다. 본 법령은 제1조에서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태국 등 제국의 정부나 또는 그 대리기관이나 또 그 국민, 회사, 단체, 조합, 기타 기관과 또는 해당 정부 등이 조직 또는 조정하는 기관이 직접 간접 또는 전부 혹은 일부를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금, 은, 자금, 통화, 증권, 예금, 채권, 유가증권, 기타 재산을 매매, 취득, 이동, 지불, 인출, 처분, 수입, 수출 기타 취급과 권리, 권력, 특권의 행사는 이 법령에 규정한 이외에는 자에 차를 금지 함.”이라고 규정하여 일본의 국·공유 재산은 무조건 미 군정청 당국에 의해 접수되는 것으로 선언했다.
다만 일본 민간인의 사유재산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사유재사의 경우는 동 법령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야 하지만, 그 자유로운 매매, 양도 등과 같은 재산의 처분이 가능하다는 것과, 필요에 따라 미군이나 조선경찰에 의한 재산의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울러 재산의 소유자(일본인)로 하여금 재산의 보존을 철저히 하고 또한 의무적으로 관계 서류의 작성과 정리, 보관 등을 철저히 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민간의 재산권에 대해서는 그것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입장을 취했다.
이로써 당시 민간인 소유의 사유재산은 미군정의 접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즉 사유재산은 어디까지나 그 재산권의 법적 보호를 받게 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동년 9월 28일에 있었던 군정법령 제4호는 일본 군부 재산에 대한 몰수조치만을 단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일본 육·해군 소속의 모든 재산은 그 매매, 취득, 양도를 금지하고 (제1조), 동시에 이들 재산은 이미 미국의 소유로 되었으므로 미국이나 기타 연합국의 허가 없이 이들 재산을 점유하는 것 등의 행동은 분명한 불법임을 천명하고(제2조), 이를 어길 때에는 가차 없이 미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처벌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註02
(2) 일반인의 무장해제 (법령3호)
1945년 9월 23일 공포되고 10월 2일부터 시행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미군정청 법령 제3호는 제1조 “일반인민의 무장해제”에서 “조선 내의 일반 인민은 그 종족을 불문하고 조선정부와 혹은 그 위임한 관청이 명령을 발(發)하여 지정한 장소와 시일에 각종의 검(劍)과 절복도(切腹刀)를 인도할 일”이라고 하여 일반인의 무장해제를 지시했다.
이와 함께 제2조, “전가보(傳家寶) 혹은 역사적 유물인 무기”에서는 “검(劍)과 절복도(切腹刀)로서 현 소유자가 전가보(傳家寶)나 역사적 유물로 귀중히 여기는 것은” 소유자가 성명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하여 가보나 역사적 유물에 대한 예외를 일정하게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제3조, “벌칙”에서 “본 법령의 규정을 범하는 자는 군율재판의 유죄판결을 받는 동시에 그 소정한 형벌에 처함”이라고 하여 ‘점령군’으로서 피 점령지 인민들의 무장해제에 대한 고압적 태도를 드러냈다. 이러한 미군정의 태도는 1945년 9월 29일에 공포된 법령 제5호, “일반인민의 무장해제, 무기탄약 또는 폭발물의 불법소유 금지”로 이어졌다.
(3) 지방회 해산 (법령60호)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미군정청 법령 제60호 “지방회”는 제1조에서 “1945년 8월 15일 이전 38도 이남 조선 내에 존재한 각 도회(道會), 이하 별기하는 하급 부회(府會), 읍회(邑會), 면협의회(面協議會), 각 군(郡), 도(島)의 학교 평의회를 이에 해산함”이라고 하여 일제강점기 지방조직을 모두 해체했다.
또한 제2조에서 “도지사는 그 소관 내 지방회의 모든 자금, 기록, 재산을 지정한 군정관 또는 직원의 관리, 통제 하에 두게 하고 다시 조선 군정장관의 지령이 있을 때까지 군정청 재산으로서 보관, 유지, 보호케 할 일”이라고 하여 일제강점기 재산의 군청청 귀속을 명령했다.
군정청 법령 제60호는 1946년 3월 14일자에, 러취 군장장관 명의로 공포되었으며 제3조에서 “본령은 공포일시 10일 후에 효력을 생함”이라고 하여 1946년 3월 24일부터 발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미군정은 해방 이후 조선인들의 자치조직이라 할 수 있는 건국준비회, 인민위원회를 모두 부정하고, 기존의 일제강점기 지방조직들을 활용하다가 1945년 12월말까지 남한 전역에 진주를 완료하고 1946년 1월 14일 주한미군정 사령부를 설립하면서 주한미군정 사령부(중앙)-군정단(도 군정)-군정중대(시·군 군정)-군정중대 파견대의 지휘체계를 수립하고 나서야 일제 강점기 지방조직을 해체시킨 셈이다. 총 7개의 군정단은 각 도의 도청소재지에 파견되어 도 군정을 운영하였고, 산하의 총 37개 군정중대를 감독하였다. 군정중대는 시·군 단위 지방에 파견되었고, 지역에 따라 군정중대는 하나 또는 수개의 군정중대파견대를 상시 혹은 임시로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군정단의 규모는 대개 장교 13명, 사병 26명(정원은 장교 20명, 사병 52명)이었고, 군정중대는 장교 12명, 사병 60명(정원은 장교 20명, 사병 56명) 정도였다.
註03
(4)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 조례’
식민잔재에 대한 인적 청산의 과제는 미군정의 현상유지정책에 의하여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일제시기에 관리를 지낸 자들이 모두 처벌되어야 하는 친일파·민족반역자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친일파·민족반역자의 명확한 규정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이 인적 청산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해방공간에서 현실적인 헤게모니의 장악을 위한 정치적 투쟁의 과정에서 인적 청산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승만과 한민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친일파 청산을 필수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註04 미군정에 의해 정국의 주도권이 확립된 이후 한민당의 건의에 의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설치를 공표하자 1946년 10월 7일 중도좌우세력이 참여한 좌우합작위원회는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심리, 결정하여 실시하게 한다는 등의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고 이를 군정장관에게 건의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원한 입법의원은 개원 직후부터 의원자격 문제에서 친일파 문제가 제기되었다. 친일파 처리 문제는 정부수립 후로 미루지는 군정청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1947년 1월 9일, 친일파·민족반역자처리를 위한 법안을 제정하기 위한 특별법기초위원회가 설치, 구성되었고, 1947년 3월 13일 제 30차 회의에 초안이 상정되었다. 초안은 수정안, 재수정안으로 변경되면서 약 4개월간의 격론을 거친 후에 1947년 7월 2일 최종 통과되었다.
이 특별조례는 각 적용대상자들에 대하여 형사처벌을 할 것을 정하고 있으므로, 형사법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만 처벌대상이 되는 각 행위들이 모두 조례 제정 이전에 행해진 행위들이므로 일종의 형사소급입법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이 점에서 본다면, 형사법의 일반원칙인 소급입법금지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었으나, 해방이라는 혁명적 상황 하에서 과거청산을 위한 특별입법(ad hoc legislation)이었으므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형사법으로서의 성격상 처벌대상이 되는 행위가 명확해야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도 상당히 구체적이며 특정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또 다른 특징적인 것은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재판소를 두도록 한 점이다. 조사위원회위원과 판사 및 검사를 과도입법의원에서 선거하도록 한 것은 기존의 경찰, 사법 그리고 행정의 영역이 모두 식민시대의 관리들로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칫 이들에 의해 친일파처리가 왜독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註05
특별조례는 제 1조 4항을 제외하고는 그 적용의 시한으로 3년의 공소시효를 두었는데, 이 규정 또한 초안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가 수정 및 재수정을 거치면서 삽입된 것이었다. 친일반민족행위의 처벌에 공소시효를 둔다는 것 자체가 처벌의 가능성을 회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는 것으로 수정 및 재수정의 과정에서 친일행위자로 의심을 받는 입법의원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개별적인 규정으로서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 등의 각 규정들은 초안의 내용에 비하여 상당히 범위가 축소되었고 그 처벌도 약화되었다. 이것은 초안의 내용이 그 적용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고 그 처벌도 너무 가혹하여 민족반역자의 처벌보다는 사회혼란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비판에 직면하여 수정 및 재수정을 거쳐 대폭 축소된 것이었다. 특히 수정 및 재수정 과정에서 친일행위자로 의심받는 자들이 참여하여 규정을 축소함으로써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처럼 특별조례가 초안에 비해 범주가 축소되고 처벌규정도 약화된 채 제정된 것은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처리를 반대한 의원들의 강력한 반발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특히 민선의원들은 초기에 특별법 기초위원회에 참여를 기피하는 등 친일파처벌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입장이었지만, 법안이 구체화되자 법안마련에 적극 참여해 법안의 약화를 주도하였다. 또한 이 법률의 적용대상이던 친일파들이 법 제정을 반대하는 집회개최와 신문광고, 그리고 의원들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특별조례 제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특별조례 제정을 주도한 중도 좌우 세력이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민선의원들이 중심이 된 극우세력들의 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註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