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선언에서 포츠담선언까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11월 22~26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주석은 연합국의 대일(對日) 전후(戰後)처리 방침에 관한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그 결과를 11월 27일에 서명, 12월 1일에 발표한 것이 카이로선언(the Cairo Declaration)이다.
이 회담을 통해 중국은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영국·소련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4대 열강으로 등장했다. 미국의 전후 세계 전략 구상의 일환으로 중국도 4대 강국의 자리에 초대되었던 것이다. 이 회담의 핵심 의제는 중국의 권리 및 영토 회복에 관한 것이었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은 일본이 1914년 이후 점령한 태평양의 위임 통치령, 중국으로부터 도취(盜取, stolen)한 영토(만주·대만·팽호도 등), 탐욕과 폭력으로 점령한 지역 등에서 구축된다고 결정했다. 이와 함께 적절한 시기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이 약속되었다.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기 3대 강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 (상태가) 될 것을 결의한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카이로선언은 ‘전후’ 한국 독립을 약속한 연합국 최초의 공약이었고, 한국은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은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다. 또한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자유·독립 회복을 결정했지만, 그 시기를 지금 즉시나 종전 직후가 아니라 ‘적절한 시기’라고 규정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다국적 신탁통치 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은 포츠담회담으로 이어졌다. 포츠담회담은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한 뒤, 일본의 항복 문제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의 전시 회담이다. 회담은 1945년 7월 17일에 시작하여, 8월 2일 종결되었다. 회담의 주요 의제는 패전국 독일의 통치방침, 해방국 폴란드의 서부 국경 결정,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점령 방침,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역할, 패전국의 배상금문제, 대일(對日) 전쟁 수행 방침 등이었다.
포츠담선언(the Potsdam Declaration)은 1945년 7월 26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 중화민국 주석이 서명했고, 8월 8일 대일전 참전과 동시에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도 서명했다. 포츠담 선언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5항은 전문(前文)으로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6항은 군국주의의 배제, 제7항은 일본 영토의 보장점령, 제8항은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 제9항은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은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및 강화, 언론·종교·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제11항은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 유지의 허가, 제12항은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은 일본군대의 무조건항복을 각각 규정하였다. 한국 독립 문제와 관련된 포츠담선언의 제8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홋카이도(北海道)·큐슈(九州)·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 (The terms of the Cairo Declaration shall be carried out and Japanese sovereignty shall be limited to the islands of Honshu, Hokkaido, Kyushu, Shikoku and such minor islands as we determine.)”
이처럼 포츠담선언은 카이로선언을 승계해 전후 일본의 영토를 구체적으로 특정한 것이었다. 카이로선언은 포츠담선언 제8조에서 인용됨으로써, 연합국들의 공식 대일 영토정책이 되었다. 일본은 항복 선언에서 포츠담선언을 수락했고, 따라서 카이로선언의 영토 조항이 전후 연합국과 일본 모두에게 일본영토 처리의 합의된 기준점이 되었다.
그러나 카이로선언과 이를 승계한 포츠담선언을 곧바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비인도적이고 비합법적인 것임을 확정한 것으로, 다시 말해 한반도 독립이 그런 비인도적이고 비합법적인 지배로부터의 광복(光復)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선언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미국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만으로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주권이 정식으로 종료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여부를 고민하면서 주권이 종료되었음을 별도로 천명할 절차가 필요한지 그 여부를 검토했다. 따라서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한반도 독립의 실현을 국제 정치에서 흔히 일어나는 전후 단순 영토 분리의 문제로 확정하는 기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