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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R 보고서, 국회가대통령에 선제공격-52년 이미지뷰어 새창

  • 1952년 05월 05일

Intelligence Report

IR 5889 May 5, 1952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REPUBLIC OF KOREA NATIONAL ASSEMBLY TAKES INITIATIVE AGAINST PRESIDENT RHEE

Since January, when It decisively defeated Rhee's efforts to amend the Constitution to provide for direct popular election of the President, the ROK National Assembly has contended itself with standing firm under mounting pressures and political maneuvers by Rhee. In three recent actions, however, the Assembly has taken the initiative in its conflict with the President, threatening to bring the conflict to a critical stage:
1. On April 16, the Assembly passed a bill reiterating immunities already held by Assembly members and election officials and candidates under the Constitution and law. This was a clever political move, obviously intended to focus public attention on Rhee's conduct toward the Assembly and the elections. It followed close after the indictment of one of the opposition leaders in the Assembly for alleged financial irregularities during earler tenure of an executive position and came in the midst of a local election campaign in which pro-Rhee candidates are predominant.
2. On April 17, the Assembly proposed a constitutional amendment favoring a parliamentary system of government. This major and direct assault on the President's powers is a sequel to similar efforts made in early 1950 and in late 1951, but holds more strength than the previous efforts: although only a one-third vote of the Assembly is required to propose an amendment, the April 17 action was taken by more than two-thirds -- adequate to pass the amendment after the 30-day waiting period if the Assembly holds firm.
3. On April 19, the Assembly reacted immediately to the forced resignation of Prime Minister CHANG Myon and passed an amendment to the Government Organization Law, by a vote of 66-0 out of 97, requiring that nomination to the Prime Minister post must be made within ten days after a vacancy occurs. This action was designed to prevent the President from circumventing the requirement of Assembly confirmation for the Prime Minister by designating an Acting Prime Minister.
The moves by the Assembly enumerated above were probably precipitated by the recent return of Prime Minister CHANG to Korea and by the imminence of local elections which began April 25. It appears probable, however that the political offensive now being staged by Rhee's opponents is motivated by fear of his growing power. Rhee has been improving his position in several ways. His few consistent supporters among the older Assemblymen and his new supporters elected in the February 5 by-elections have achieved some success in developing a pro-Rhee bloc in the Assembly. At the same time, he has developed a threat to the Assembly by using governmental organs as well as his partisan organizations to circularize petitions to recall Assembly members -- a device not provided for in, and inconsistent with, the Constitution. His Liberal Party has been conducting an intensive organizing campaign, as well as a campaign in the local elections. His agitation against the cease-fire and against the Japanese in the current ROK-Japanese negotiations also has afforded him some advantage, and he has been popularizing his demands for direct election of the President. Also, Rhee's opponents may be concerned over the fact that the militant clique of YUN Ch'iyong, Louise IM, and YI Pomsok has been gaining increasing ascendency within the pro-Rhee grouping. Having secured control of the Justice Department and of the power complex in the Homes Affairs Department and police in early 1952, this clique in late March gained the ministerial post in the other major power complex -- the Defense Department and Army, especially the Counter Intelligence Corps and the military police. In April, this clique was continuing to intrench itself in the Defense Department, and was approaching so complete a monopoly of power that it would not have feared resistance or counter-action such as the Communist spy ring allegations of December 1951.
Rhee's first response to the Assembly's action was conciliatory: he offered the Prime Minister post to CHANG T'aeksang, Vice-Speaker of the Assembly who has the support of some anti-Rhee elements in the Assembly although there are some evidences that he may have come to an understanding with Rhee. At the same time, Rhee is reported to be mustering all his political forces to oppose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calling for parliamentary government, which will be decided upon by the Assembly 30 days after it is published, Since this amendment would strip Rhee of the governmental powers comprising a major element of his political strength, he must now in effect lose or win his fight for re-election before the decision on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Since the amendment was proposed with a strength more than adequate to adopt it, and the other actions of the Assembly against Rhee were taken by strong majorities, there remains a real possibility that he may soon veer toward even more intimidatory and forceful tactics than he has used in the past, even though his first thinking on the Prime Minister problem was in terms of conciliation. He has made a loyal supporter Acting Prime Minister, pending Assembly action on his nomination of CHANG, has vetoed the two bills described above, and apparently has not yet discharged his constitutional duty of publishing the proposed constitutional amendment.
OIR REPORT NO. 5889 REPUBLIC OF KOREA NATIONAL ASSEMBLY TAKES INITIATIVE AGAINST PRESIDENT RHEE (MAY 5 1952)
IR 5889 1952년 5월 5일

이 보고서에 반영된 사료들에 대한 최종분석은 1952년 5월 5일, 극동조사국에 의해 완료되었다.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개헌을 위한 이승만의 노력을 결정적으로 저지했던 1월 이후, 한국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압박과 책략에 맞서 확고한 입장을 지키기 위해 계속 저항해왔다.[역주 : 1952년 1월18일 이승만이 제출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대해 국회는 163명 의원 재석에 가 19표, 부 143표로 압도적인 부결을 결행한 바 있다.] 그러나 국회는 최근의 세 가지 조처를 통해 갈등을 보다 중대한 국면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대통령과의 갈등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1. 4월 16일, 국회가 재차 통과시킨 면책특권[역주 : 1952년 4월 16일 국회는 “정치운동에 관한 법률안”을 가결했다.]은 이미 헌법과 법률에 의해 국회의원, 선관위 공무원들, 그리고 후보들에게 보장되던 것이었다. 이는 기발한 정치적 한수로, 명백히 국회와 선거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에 대중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는 지방선거 유세 도중, 후보자의 공직기간 중 부정이 폭로되었던 야당의 한 지도자에 대한 기소 직후 진행되었다. 당시 선거는 친이승만 후보들이 우세했다.
2. 4월 17일, 국회는 내각책임제개헌안을 제출하였다.[역주 : 1952년 4월 17일 원내자유당과 민국당이 중심이 되어 곽상훈 의원 외 122명의 연서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123명은 국회의원 재적 2/3보다 한명 많은 숫자였다.]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이 중대하고 직접적인 공격은 1950년 초, 그리고 1951년 말에 있었던 유사한 노력들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의 노력들보다 훨씬 강한 것이었다. 즉 국회에 개정안을 제출하는 데 필요한 정족수는 전체 의원의 1/3이면 족하다. 그런데 4월 17일의 개헌안은 전체 의원 2/3에 의해 제출되었다. 이는 국회가 유지된다면, 30일의 예비기간 이후 수정안을 통과시키기에 충분한 인원이다.
3. 4월 19일, 국회는 장면 국무총리의 해임[역주 : 1952년 4월 20일자로 원내자유당 주류가 대통령으로 추대할 것으로 알려진 장면이 국무총리직에서 해임되고 후임으로 장택상이 임명된다. 이미 이승만은 1952년 3월 18일경, 원내의 금요회 등이 장면총리 대통령 추대공작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국회에 대해 “공개적으로” 할 것을 요청한 바 있다. 내각책임제개헌안 통과와 장면 대통령 추진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 곧 장면의 해임이었던 것이다. 이미 4월18일에 원외자유당 등 전국 18개 단체, 내각책임제개헌안 반대투쟁공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上』 , 역사비평사, 1999, P49; 연정은, 1999위의 글, p112 ;국회사무처, 『국회50년연표』, 국회사무처, 2000 p.52 참조.]에 즉각 반발하며, 재적 97명 중 66대 0이라는 표결을 통해 ‘정부조직법’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수정안은 국무총리 공석이 발생할 경우, 반드시 10일 이내 (재)지명이 있을 것을 의무화한 내용을 담았다. 이러한 조치는 국무총리 대행을 지명함으로써 국무총리에 대한 국회의 필수적 승인을 피하려는 대통령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회의 이 같은 움직임들은 아마도 4월 25일 실시된 지방선거에 즈음하여, 국무총리 장면이 최근 한국으로 돌아온 데 촉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정적들이 만들어낸 현재의 정치적 공세의 주된 동기는 이승만의 권력 확대에 대한 공포였다. 이승만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정치적 지위를 더 높여왔다. 기존 의원들 중 몇몇 꾸준한 지지자들과 2월 5일 선거를 통해 새롭게 선출된 지지자들은 국회에 ‘친이승만 블록’을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원외단체들뿐만 아니라 정부조직들까지 동원하여 국회의원 소환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국회를 협박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헌법에 적시되어 있지 않고, 그것과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의 자유당은 지방선거 유세에서 그러했듯이, 집중적이고 조직적인 선전 활동을 펼쳤다. 정전협정 반대시위, 현하 한일회담에서 대일 반대시위 또한 그에게 다소간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대통령직선제에 대한 자신의 요구를 꾸준히 공론화해왔다. 또한 이승만의 반대파들은 친이승만 계열 내에서 윤치영. 루이스 임(Louise IM)[역주 : 임영신] 그리고 이범석과 같은 호전적 파벌이 점차 2인자로 득세하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1952년 초 법무부, 그리고 내무부와 경찰의 권력 통제를 확보한 이 파벌은 지난 3월 말 다른 중요 권력, 즉 국방부와 육군, 특히 방첩대와 헌병에서 장관급 직위를 확보했다. 4월에도 이들은 국방부를 계속 장악해 권력을 독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때문에 지난 1951년 12월에 발생했던 공산당 간첩 협의와 같은 반발 행동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회의 조처에 대한 이승만의 첫 번째 대응은 회유였다. 그는 장택상에게 국무총리직을 제안했다. 국회부의장 장택상은 이승만과 합의에 도달했다는 일부 증거가 있긴 하지만, 국회에서 몇몇 반이승만 파를 지지했던 인물이다. 동시에 이승만은 의원내각제를 요청하는 헌법개정안에 반대하기 위해 그의 모든 정치력을 총동원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개헌안은 제출된 지 30일이 되면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다. 이 개헌안은 삼권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인 행정부의 권력을 이승만으로부터 박탈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개헌이 결정되기 전 지금 당장 자신의 재선을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야만 한다. 개헌안이 그것을 채택하기 위해 필요한 수보다 훨씬 많은 의원의 연서로 제출되었고, 국회의 다른 조처들 또한 다수에 의해 취해진 것이기 때문에 이제 현실적으로 남은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즉 그는 그가 과거에 그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강력한 전술로 방향을 전환할지 모른다. 비록 그가 처음에는 화해의 관점에서 국무총리 문제를 사고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는 국회가 아직 장택상 임명을 승인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충직한 지지자, 즉 장택상을 국무총리 대행에 앉혔고, 위에 언급한 두 가지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또 발의된 개헌안을 발표해야 하는 헌법에 적시된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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